언어·촉각·청각 아우른 뉴아트
전시장에 들어서자 진회색 펠트로 제작한 부조가 눈길을 붙잡는다. 얼핏 추상조각이나 모노크롬(단색화) 회화의 이미지를 닮았다. 작품 이름은 ‘자신만을 위한 말’. 작품에 귀를 대 보니 침묵만이 흐른다. 허를 찌르는 상식의 파괴가 보는 이에게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소리를 흡수하는 펠트로 덮인 벽 앞에서 침묵의 소리를 듣고 ‘자신만을 위한 말’을 생각해 보라는 얘기다.

21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한 개념미술가 안규철 씨(62·사진)의 개인전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파한다. 바로 지금 당신의 소소한 감정에 충실하라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씨는 “시각예술이 이제는 언어적, 공간적, 촉각적, 청각적 경험으로 확장되므로 관람객은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라고 강조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안씨는 관람객의 오감(五感)을 자극해 ‘느낌의 미학’을 전파해온 작가다. 부조리한 사회와 미술계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형 조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1990년대 개념적인 오브제와 텍스트 작업, 2000년대 이후에는 건축적 규모의 설치 작업과 공공미술로 작업 영역을 확장했다.

다음달 31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회 주제는 작품 제목에서 따온 ‘자신만을 위한 말’. 원이나 구, 직선, 나선 구조 같은 보다 조형적 형태들을 모티브로 종, 펠트, 자전거 등 구체적인 사물의 상태와 물성에 주목한 작업 10여점을 내놨다.

그의 작품은 시사적 맥락과 일상적 삶의 연장선에서 복합적이고 다의적인 뜻을 담고 있다. 이 때문에 보는 순간 작가가 의도한 뜻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작가와 관람객이 적당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미술이란 결코 ‘쉬운 게임’이 아님을 시사한다.

설치작품 ‘머무는 시간 I, II’ 앞에서 작가는 “목재 레일 구조물을 따라 나무 공이 천천히 굴러 내려가게 한 작품”이라며 “중력에 의해 높은 곳에서 아래로 구르면서 여러 가지 우연에 의해 방향을 바꾸거나 멈추는 공의 움직임에서 착안했다”고 설명했다. 공의 추락이 지연되는 ‘머무는 시간’이 시작과 끝이 있는 우리의 삶을 은유한다는 얘기다.

펠트로 제작한 ‘침묵의 종’은 소리를 만들고 신호를 전달하는 종의 원래 기능이 제거된 사물의 역설적인 상태를, 회화 작품 ‘달을 그리는 법’은 실제 사물과 이미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간극을, ‘노/의자’는 한곳에 머무는 의자를 통해 노를 저어 여행을 꿈꾸는 상상을 보여준다. (02)735-8449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